신성화 - 한마음 선원 대행 큰스님의 영적 에너지 시각화 (2019)

Hanmaum Sunwon Daehaeng Monk Low
'이 신성화 이미지는 2019년에 'Tistory Blog'에 포스팅되었으며 자료 통합과 정리를 위해 업로드합니다.'

대행 큰스님의 신성화, 짧은 해설

대행 큰스님의 ‘영적 중심’을 둘러싸고 부드럽게 회전하는 에너지층이 몇 겹으로 드러난다. 영적 중심 바로 위에는 조용히 빛나는 ‘빛의 상징'이 자리한다. 그녀를 감싸는 다층 구조의 광배(만돌라)가 펼쳐지며, 그 자체로 잔잔하고 든든한 빛의 보호막을 만들어낸다. 만돌라 안쪽에는 영적 에너지의 아우라가 은근하게 퍼지면서 그녀가 지닌 평온한 힘을 짐작하게 한다.

대행 큰스님 그리고 그녀의 삶

어린 시절, 대행 큰스님은 집에서 아버지의 분노를 피해 한국 하늘 아래 종종 밖에서 잠들곤 했다. 1927년 노점순으로 태어난 그녀는 나중에 대행 큰스님으로 불리며, 전 세계 15만 명이 넘는 이들에게 불교 가르침을 전파했다.

상실과 경이로 얼룩진 어린 시절

대행 큰스님의 어린 시절은 전쟁 소설 속 한 장면처럼 읽힌다. 가족은 한때 부유하여 서울 이태원에서 한강까지 뻗은 넓은 땅을 소유했다. 아버지는 조선의 옛 군인 가문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는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러나 1932년경 일본 비밀 경찰이 그를 찾기 시작하면서 가족의 운명은 급변했다.

체포 직전 겨우 한강을 넘어 산속 움막으로 도망친 가족은, 친구나 가족과 안전하게 연락할 수 없었다. 가난한 생활 속에서 남은 쌀알과 야채를 줍는 것으로 연명했다. 어린 대행은 화난 아버지를 피해 밤이면 밖에서 잠들었고, 그 힘든 시기 ‘왜 사람들이 고통받는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평생을 이 질문과 함께했다.

여덟 살이 되었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대행 스님은 불교에서 깨달음이라 부르는, 삶의 근본 본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경험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한 아이에게 이 순간은 단순한 영적 체험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 속에서 평화를 찾도록 다른 이들을 돕는 평생의 사명의 시작이었다.

산중에서 길을 찾다

1948년, 21세 무렵 대행 큰스님은 존경받는 한암 큰스님에게 정식으로 출가했다. 한암 큰스님은 25년간 오대산 상원사에 머무르며 한국전쟁 때도 군인의 대피 명령을 거부한 인물로, 대행의 수행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출가 후 대행 스님은 허름한 옷차림으로 산을 떠돌며 닥치는 대로 먹었다. 이는 고난을 즐기기 위한 게 아니라, “근본 부처 본질에 모든 것을 맡기는” 수행에 몰두하기 위함이었다. 즉, 우리 안 깊은 곳에 있는 지혜를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1959년경 치악산 상원사 아래에 자리한 암자에 정착했고, 1960년대 중반에는 원주로 이동했다. 이 공간의 변화는 단순한 장소 이동이 아닌 영적 성장의 여러 단계를 상징한다.

전통의 틀을 깨다

대행 큰스님이 당대 다른 스님들과 달랐던 점은 모든 사람이 불교 수행을 할 수 있다고 본 대담한 시각이었다. 전통적인 한국 선불교는 비구와 일부 비구니만 가르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대행 스님은 직업과 가정을 가진 재가자들도 깨달음에 이를 잠재력이 있다고 믿었다.

1972년 그녀는 안양에 ‘한마음 선원’을 열었다. ‘한마음’은 모두가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며, 남녀노소, 신분과 상관없이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녀의 가르침은 실용적이었다. 앉아서 하는 명상뿐 아니라, 일상에서 마주하는 어려움에도 불교 원리를 적용하는 법을 전했다. 직장에서의 갈등, 아픈 아이 돌보기, 경제적 걱정까지 모두에 적용 가능했다.

운동으로 성장한 불교

대행 스님이 2012년 세상을 떠날 때, 작게 시작한 공간은 세계로 뻗어나갔다. 한마음 선원은 한국에 15곳, 해외 10곳 이상 개설됐고, 그녀는 100명 넘는 비구니와 50명 이상의 비구를 지도했다. 재가 신도도 15만 명이 넘었다.

이는 우연이 아니었다. 대행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세 가지 원칙에 집중했다. ‘남을 나처럼 보고, 사랑하며, 모두가 연결된 하나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를 불성이나 진아, 혹은 신(부모)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면서도 각자의 방식대로 받아들이길 인정했다.

비판과 논란

대행 스님의 혁신적 접근은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전통 불교계 일각의 비판과 논쟁이 이어졌다. 일부 학자는 그녀의 가르침이 정통 불교와 맞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 비판들이 전혀 부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대행 스님은 전통과 달리 재가 수행에 무게를 두며 한국 불교의 오랜 관습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학계에선 이를 지지하거나 반박하는 연구가 공존하며, 많은 연구가 신도들의 후원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

이 논쟁이 10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대행 스님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하다는 방증이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대행의 현실적 영성은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었다. 그녀가 만든 한마음 선원은 현재도 전 세계에서 운영되며, 《Wake Up and Laugh》, 《Like Lions Learning to Roar》 등의 저서도 새로운 독자를 만나고 있다.

가장 큰 공적은 일상 속 문제에 부딪힌 평범한 이들이 수행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는 점이다. 종종 영성은 멀고 추상적으로 느껴지지만, 대행은 가정과 직장, 자녀양육을 하면서도 찾을 수 있는 평화와 지혜를 선사했다.

별빛 아래 불안한 아이에서 수백만 이들의 삶을 밝힌 스승으로, 대행 큰스님의 인생은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깊은 지혜가 싹틀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녀의 가르침 전부를 믿지 않더라도, 그녀가 품었던 근본적인 인간적 바람은 분명하다. 바로 고통을 줄이고 더 자유롭고 존엄한 삶을 돕고픈 마음이다.

복잡해지는 오늘날 세상에서 여러 이들이 평화와 의미를 찾는 가운데, 대행 큰스님의 단순한 메시지는 여전히 중요한 울림을 준다. 스스로 안에 담긴 지혜를 믿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게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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