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의 신성화(2019)

Teresa of Avila Low
'이 신성화 이미지는 2019년에 'Tistory Blog'에 포스팅되었으며 자료 통합과 정리를 위해 업로드합니다.'

카톨릭의 성직자 중에서 신과의 합일을 이룬 사람은 누구일까?
아빌라의 성 테레사는 새로운 신성화로 다시 그려질 예정이다.

2019년에 그려진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신성화 작품에 대한 간략한 설명

그녀의 영적 중심부에서 십자가 모양의 에너지 상징이 솟아오른다. 십자가는 여러 의미를 담고 있지만, 신성화에서는 주로 정화를 나타낸다. 빛이 그녀의 온몸을 감싸고, 영적 에너지가 머리에서부터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아빌라의 테레사: 모든 것을 바꾼 스페인 성녀

아빌라의 테레사가 일곱 살이었을 때, 오빠와 함께 집을 몰래 빠져나와 아프리카로 걸어가기로 했다. 신앙을 위해 순교자가 되어 천국에 가서 하느님을 만나겠다는 목표였다. 다행히 삼촌이 마을 바로 밖에서 이들을 발견해 집으로 데려왔다. 이 모험심 넘치는 어린 소녀는 훗날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테레사는 1500년대에 종교생활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스페인 수녀였다.

특권층 출신의 거대한 꿈

테레사 데 세페다 이 아우마다는 1515년 3월 28일 스페인 아빌라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가문에서 모든 편안함을 누렸지만, 어린 테레사는 훨씬 더 큰 무언가를 갈망했다. 성인들의 이야기와 순교자들의 일화를 탐독하며 하느님을 위한 장대한 모험을 꿈꾸었다.

열네 살에 어머니를 잃고 깊은 절망에 빠진 테레사는 성모 마리아에게 위로를 구하며 영적 어머니가 되어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십대 시절은 곧 다른 유혹들을 가져왔다. 연애소설과 패션, 보석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전형적인 십대의 관심사였지만 아버지를 걱정시켰다.

딸의 새로운 관심사가 염려된 아버지는 테레사를 아우구스티노 수녀원에 보내 교육받게 했다. 그곳에서 무언가가 바뀌었다. 테레사는 종교생활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지만, 결심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수도원 담장 안에서

스무 살에 테레사는 몰래 아빌라의 성모 강생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가 '예수의 테레사'라는 이름을 받았다.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못했지만 테레사는 마음이 이끄는 대로 따랐다.

수도원 생활은 곧바로 어려움을 드러냈다. 테레사의 건강이 악화되어 3년간 침상에 누워 지내야 했다. 이 고통스러운 시기에 그녀는 정신적 기도법을 발견했다. 이는 그녀의 전체 영성 여정을 형성하게 될 수행법이었다. 회복 후에도 15년간 영적으로 메마른 시간을 보냈다.

수도원 또한 그리 엄격하지 않았다. 수녀들은 개인 방을 가지고 보석을 착용했으며 애완동물을 기르고 손님들을 정기적으로 맞이했다. 테레사도 사교생활을 즐겼지만 점차 이런 잡념들이 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개혁의 혁명

1555년, 마흔 살의 테레사에게 모든 것을 바꾼 깊은 각성의 순간이 찾아왔다. 가르멜 수도회의 삶이 원래의 단순함과 기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테레사는 수녀들이 세속적 관심사에서 완전히 물러나 오로지 관상과 참회에만 전념하는 수도원을 꿈꾸었다. 이는 방문객도, 사치품도 없이 가난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다. 격렬한 반대를 불러일으킨 급진적인 생각이었다.

1562년, 교황 비오 4세의 축복을 받아 테레사는 첫 번째 개혁 수도원인 성 요셉 수도원을 열었다. 수녀들은 맨발로 다니거나 간단한 샌들을 신었기 때문에 '맨발의 가르멜 수녀'로 불렸다. 이것이 스페인 전역과 그 너머로 퍼져나갈 운동의 시작이었다.

영성 네트워크 구축

지속적인 건강 악화에도 불구하고 테레사는 다음 20년간 스페인 곳곳을 누비며 가는 곳마다 수도원을 세웠다. 끔찍한 길을 따라 산과 강을 건너고, 거친 숙소에서 잠을 자며, 기본적인 음식으로 연명했다. 그러면서도 건설 프로젝트를 관리하고 교회 정치를 헤쳐나갔다.

테레사는 조직 운영의 귀재가 되어 새벽 5시부터 자정 넘어까지 일했다. 왕족과 협상하고 어려운 교회 관계를 관리했으며 심지어 스페인 종교재판소의 조사까지 받았다. 누군가 휴식이 필요하다고 제안했을 때 테레사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휴식? 휴식은 필요 없어요! 필요한 건 십자가예요!"

젊은 사제 후안 데 예페스(훗날 십자가의 성 요한)와의 동반자 관계는 필수적이었다. 1568년 함께 남성을 위한 첫 번째 개혁 가르멜 수도원을 세웠다. 테레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7개의 수녀원과 수많은 수도원 설립을 도왔다.

신비로운 만남과 불멸의 문학

테레사의 개혁 사업도 인상적이었지만, 그녀의 신비 체험과 영성 저술이야말로 진정 그녀를 구별되게 한 것이었다. 환시와 내적 대화, 신체적 현상을 포함한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을 기록했다.

가장 유명한 신비 체험은 천사가 황금 화살로 그녀의 심장을 꿰뚫어 신적 사랑으로 채운 것이었다. 이 일화는 너무 유명해져서 조각가 베르니니가 로마에서 이를 묘사한 놀라운 조각상을 만들었다.

테레사는 이런 체험들을 오늘날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책들에 기록했다. 걸작인 『영혼의 성』은 수많은 방이 있는 수정 성을 비유로 삼아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여정을 설명한다. 자서전과 『완덕의 길』 등 다른 작품들도 썼다.

테레사 글의 특별함은 접근하기 쉽고 솔직하며 대화체 같은 문체에 있었다. 말하는 대로 글을 써서 유머와 언어유희로 복잡한 영성 개념을 일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느님과의 영원한 일치

테레사는 1582년 10월 4일 또 다른 수도원을 세우기 위해 여행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9개월 후 그녀를 따르던 이들은 시신이 전혀 부패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이것이 성인품에 오르는 길의 시작이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5세는 1622년, 테레사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40년 만에 그녀를 성인품에 올렸다.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는 그녀를 첫 번째 여성 '교회박사'로 선포하여 그녀의 저술이 기독교 가르침에서 특별한 권위를 갖는다고 인정했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관상적 영성과 실천적 행동의 완벽한 결합을 보여준다. 신비 체험과 행정적 탁월함이 함께 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10월 15일 그녀의 축일은 단순히 한 성인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크게 꿈꾸고 결단력과 기도, 평범한 사람도 비범한 영적 높이에 이를 수 있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킨 여성을 기념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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