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 헵번의 신성화 (2019)

Audrey Hepburn Low
'이 신성화 이미지는 2019년에 'Tistory Blog'에 포스팅되었으며 자료 통합과 정리를 위해 업로드합니다.'

오드리 헵번의 신성화에 대한 간략한 설명

영화사에는 수많은 빛나는 스타들이 있었지만, 오드리 헵번은 그들 중에서도 정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어린 시절 전쟁의 참혹함으로 상처받았지만, 영화계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존재로 자리잡았고, 이후 인도주의 활동으로 전환하여 말년에는 난민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다.

고통과 영광, 헌신과 봉사로 점철된 그녀의 삶은 오늘날에도 강력한 울림을 준다. 스타덤의 절정에서도 보여준 그 유명한 소박한 생활방식이 그녀의 정신적 본질을 형성했을지도 모른다. 헵번의 신성화는 이러한 단순함을 놀라울 정도로 명확하게 보여준다. 전체적인 구성은 안정감과 세련됨을 드러내며 고요한 질서감을 만들어낸다.

그녀의 영적 중심에서 드러나는 빛의 상징은 은퇴 후 자선 활동의 길을 말해준다. 웅장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녀의 형태를 둘러싼 하늘색으로 회전하는 에너지장은 순수함과 평온함을 발산한다. 이 부드러우면서도 지속적인 에너지 구조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음에도 연민과 타인에 대한 봉사로 그녀를 이끌었다.

Quote

"불가능이란 없어요. 불가능하다는 말 속에도 '나는 할 수 있다'는 뜻이 숨어있거든요!"

"가장 중요한 건 인생을 즐기는 거예요.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게 전부죠."

"아름다운 눈을 갖고 싶다면 다른 사람의 좋은 면을 보세요. 아름다운 입술을 원한다면 따뜻한 말만 하세요. 그리고 우아한 자세를 갖고 싶다면,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 당당히 걸어가세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게 붙잡아야 할 건 바로 서로예요."

"저는 사랑받고 싶은 마음과 사랑을 주고 싶은 마음을 가득 안고 태어났어요."

"여성의 아름다움은 입는 옷이나 몸매, 헤어스타일에 있지 않아요. 진짜 아름다움은 눈에서 나와요. 눈은 마음으로 가는 문이고, 바로 그곳에 사랑이 머물거든요."

"나이가 들면서 깨닫게 될 거예요. 우리에게는 두 개의 손이 있다는 걸요. 하나는 나 자신을 돕기 위한 손, 다른 하나는 남을 돕기 위한 손이죠."

"우아함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 유일한 아름다움이에요."

전쟁 속에서 피어난 꿈

오드리의 이야기는 1929년 5월 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어린 시절은 공주님 파티나 화려한 장난감으로 가득하지 않았다. 어린 소녀였을 때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 아른험으로 이주했다. 오드리는 아름다운 튀튀를 입고 무대에서 빙글빙글 돌며 춤추는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오드리가 겨우 열 살이었을 때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것이다. 거리를 행진하는 군인들을 지켜봐야 했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음식이 모자라서 오드리를 비롯한 많은 아이들이 배고픈 채로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전쟁은 그녀를 몹시 아프고 약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어두운 나날에도 어린 오드리는 자신의 따뜻한 마음과 꿈만은 잃지 않았다.

전쟁통에 그녀는 발레 공연을 통해 네덜란드 레지스탕스를 위한 성금을 모으기까지 했다. 그토록 무서운 시절, 어린 나이에도 남을 위해 나설 수 있는 그런 용기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발레화에서 영화 세트장으로

1945년 전쟁이 마침내 끝나자 오드리는 어머니와 함께 런던으로 떠났다. 발레리나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최고의 선생님들에게 춤을 배웠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바꿔놓을 말을 건넸다. 키가 너무 크고 전쟁의 후유증으로 아직 체력이 부족해서 프로 발레리나가 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포기하는 대신 오드리는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런던의 극장에서 코러스 댄서로 일하기 시작했고 영화에도 단역으로 출연했다. 반짝이는 눈과 환한 미소를 가진 젊은 여성이 오디션장을 누비며 춤추는 모습을 그려보라. 자신이 곧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 중 하나가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그녀를 스타로 만든 공주 역할

In 1951, something magical happened. A famous French writer named Colette spotted Audrey in a hotel and immediately knew she was special. Colette cast her in a Broadway play called “Gigi,” where Audrey shone like a bright star.

하지만 진짜 마법은 1953년 '로마의 휴일'에서 일어났다. 오드리는 왕실의 의무에서 잠시 벗어나 로마에서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려는 공주를 연기했다. 그레고리 펙과 함께 연기하며 세상에 자신의 타고난 매력과 재능을 보여주었다. 영화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오드리는 아카데미상, 골든글로브상, 바프타상을 모두 휩쓸었다. 첫 번째 주연작으로 말이다!

오드리는 이후 수많은 사랑받는 영화에 출연했다. '퍼니 페이스'에서 경쾌하게 춤을 추었고,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는 노래까지 선보였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작은 검은 드레스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품 의상이 되었다.

하지만 오드리는 화려한 가운을 입은 아름다운 배우 그 이상이었다. 그녀를 보기만 해도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웃기면서도 슬프고, 강하면서도 부드러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감독들이 그녀와 작업하기를 좋아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어떤 역할이든 특별한 무언가를 불어넣어 주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아이들의 손을 잡다

나이가 들면서 오드리는 영화보다 더 소중한 일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1989년 유니세프 친선대사가 되어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곳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이 절실한 아이들을 만났다.

에티오피아, 방글라데시, 베트남, 소말리아까지. 전쟁 중 굶주렸던 어린 시절처럼, 오드리는 다시 배고프고 무서워하는 아이들을 마주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들을 도울 수 있었으니까.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세상에 이 아이들의 이야기를 알리고, 그들에게 음식과 약, 그리고 희망을 전할 수 있는 기금을 모았다.

이런 놀라운 인도주의 활동으로 오드리는 대통령 자유 훈장과 진 허숄트 인도주의상을 받았다. 유명세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쓸 때만 의미가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오드리를 진정으로 특별하게 만든 건 영화도, 패션 감각도 아니었다. 바로 그녀의 따뜻한 마음이었다. 어린 시절 굶주림과 두려움을 겪었던 그녀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평생 잊지 않았다. 여러 언어를 구사하고 동물을 사랑했기에 온갖 배경의 아이들과도 쉽게 마음을 나눌 수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어도 오드리는 여전히 겸손하고 친절했다. 한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은 세계 최고의 배우는 아니지만, 분명히 가장 마음씨 좋은 배우 중 하나라고.

1993년 오드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인류는 정말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미국영화연구소는 그녀를 할리우드 역사상 세 번째로 위대한 여배우로 선정했다. 더욱 의미 있는 것은 그녀의 가족이 설립한 오드리 헵번 아동기금이 오늘날에도 전 세계 아이들을 계속 돕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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