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 라마 텐진 갸쵸의 신성화 (2019)
달라이 라마 텐진 갸쵸의 신성화에 대한 간략한 설명
영적중심에서 빛의 상징이 여러 층으로 드러나며 넓게 퍼져나가고 있다. 몸은 두 개의 층으로 된 에너지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티벳불교의 법맥을 상징하는 에너지체가 좌우 하단에 균형있게 드러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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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화의 전반적인 구조를 알고싶다면 이 글을 읽어보세요. 인체의 각 부위에 따른 상징적 의미와, 자주 등장하는 영적 에너지의 상징들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2412_704c65-52> |
Quote
"우리가 사는 이유는 행복하기 위해서예요."
"기회가 될 때마다 친절하세요. 사실 언제든 가능한 일이거든요."
"행복은 누군가 만들어서 주는 게 아니에요. 바로 내 행동에서 생겨나는 거죠."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란다면 자비로운 마음을 키우세요. 내가 행복하고 싶어도 마찬가지예요. 결국 자비가 답입니다."
"사랑과 자비는 사치가 아니라 생존에 꼭 필요한 것들이에요. 이것들이 없다면 인류 자체가 지속될 수 없거든요."
"제 종교는 정말 간단해요. 그냥 친절, 그게 전부입니다."
"때로는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게 오히려 엄청난 행운일 수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자신이 너무 작아서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모기 한 마리와 함께 잠자리에 들어보세요."
소박한 승려가 세상에 끼친 영향
티베트의 외딴 농촌 마을에서 두 살배기 라모 돈둡이 놀고 있을 때, 집 앞에 낯선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그저 평범한 방문객이 아니었다. 특별한 사람을 찾는 신성한 임무를 띤 승려들이었다. 그날 일어난 일은 이 아이의 운명을 바꿔놓았을 뿐 아니라, 전 세계 수백만 명의 마음을 움직이게 됐다.
산골 마을에서 온 소년
제14대 달라이라마 텐진 갸초는 1935년 7월 6일 티베트 동북부의 바람 부는 마을 탁체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평범한 농부였고, 막내아들이 훗날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당시 그는 그저 라모 돈둡이라는 이름의 호기심 많은 아이였고, 주변 사람들에게 질문을 쏟아내는 꼬마였다.
보리밭에 둘러싸인 평범한 티베트 농가는 티베트를 상징하는 광활한 풍경 속에 자리했다. 이 세상 한편에서 삶은 거칠면서도 평화로웠고, 수 세기 동안 변함없이 이어져 온 전통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다음 달라이라마를 찾아서
1933년 제13대 달라이라마가 세상을 떠나자, 티베트 승려들은 그의 환생을 찾는 놀라운 여정을 시작했다. 티베트 불교에서 달라이라마는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인류를 돕기 위해 다시 태어나기를 선택하는 존재다. 위대한 영적 지도자들은 평화와 지혜의 사명을 계속하기 위해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온다.
환상과 징조들이 수색팀을 동북쪽으로 이끌었다. 1937년 탁체르 마을에 도착했을 때, 놀라운 만남이 펼쳐졌다. 두 살배기 라모가 변장한 수행 승려에게 다가가 그의 염주를 달라고 요구했다. 그 염주는 바로 이전 달라이라마의 것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안다면 줄 수 있다"고 승려가 말했다.
그러자 꼬마는 "세라 라마, 세라 라마"라고 대답했는데, 그의 어머니조차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었다.
추가 시험들이 승려들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놓았다. 아이는 제13대 달라이라마의 물건들을 정확히 구별해냈고, 똑같이 생긴 가짜 물건들은 거부했다.
지도자가 되는 법을 배우다
네 살에 텐진 갸초는 공식적으로 제14대 달라이라마로 인정받았다.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가족을 떠나 전례 없는 교육을 받는다는 뜻이었다. 여섯 살부터 시작된 승려 수행은 뛰어난 학자들도 버거워할 만한 교육과정이었다.
그는 논리학, 산스크리트 문법, 의학, 예술을 공부했다. 불교 철학이 핵심이었는데, 자비와 현실의 본질, 다른 이들이 행복을 찾도록 돕는 방법을 배웠다. 한때 산간 초원에서 뛰놀던 소년은 이제 라사의 웅장한 포탈라궁에 살며 고대 경전을 외우고 학식 높은 승려들과 복잡한 사상을 토론했다.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텐진 갸초는 티베트 밖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았다. 열한 살 때 오스트리아 출신 등반가 하인리히 하러와 친구가 되면서 히말라야 너머 세상을 접하게 됐다. 이 관계를 통해 더 넓은 세상을 알게 됐고, 그 세상은 곧 그에게 모든 것을 요구하게 될 터였다.
고향을 떠나다
1950년은 재앙의 해였다. 중국군이 티베트를 침공하며 이 지역을 중국 영토라고 주장했다. 열다섯 살 텐진 갸초는 갑자기 민족의 가장 어두운 시간에 그들을 책임져야 하는 처지가 됐다. 9년 동안 그는 티베트 문화를 지키면서 중국 당국과 협력하려 노력했다.
1959년이 되자 상황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티베트인들이 중국 통치에 맞서 일어서자 달라이라마의 생명이 위험해졌다. 스물세 살에 그는 가슴 아픈 선택을 해야 했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는 채 티베트를 떠나는 것이었다.
그의 탈출은 마치 모험 소설 같았다. 군인으로 변장한 그는 어둠을 틈타 라사를 빠져나와 인도로 향하는 험난한 히말라야 여정을 시작했다. 몇 주간의 위험천만한 여행 끝에 그는 안전한 곳에 도착했지만, 고향 없는 지도자가 되고 말았다.
평화의 목소리
인도가 피난처를 제공했고, 그는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세웠다. 이곳은 곧 '작은 라사'라고 불리게 됐다. 여기서 그는 인생을 정의하게 될 도전과 마주했다. 폭력 없이 어떻게 자유를 위해 싸울 것인가?
불교의 자비가 답을 제시했다. 전쟁이나 복수를 외치는 대신, 달라이라마는 대화를 선택했다. 그는 전세계를 돌며 평화와 관용, 이해의 메시지를 전했다. 세계에서 가장 잔혹한 정치적 갈등 중 하나에 대한 그의 온화한 대응은 국제적 관심을 끌었다.
1989년 노벨위원회는 그에게 평화상을 수여하며 "모든 생명체에 대한 존경을 바탕으로 한 불교 평화 철학"을 인정했다. 그들은 "잔혹한 인권 침해"에도 불구하고 타협을 추구한 그의 노력을 칭찬했다.
중도의 길
가장 놀라운 점은 달라이라마가 결국 티베트 독립 요구를 포기했다는 사실이다. 1974년까지 그는 '중도 접근법'을 발전시켰는데, 완전한 분리가 아닌 중국 내에서의 의미 있는 자치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런 변화는 일부 지지자들을 당황시켰지만, 실현 가능한 해결책에 대한 그의 의지를 보여줬다.
그는 2020년 "중화인민공화국 안에서 '공화국' 개념을 선호한다"며, 티베트인들이 문화를 보존하면서도 중국의 경제 발전 혜택을 누릴 수 있다고 믿는다고 설명했다. 이런 실용적 입장은 강경파들의 비판을 받지만, 민족의 복지를 위해 기꺼이 변화하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준다.
소박하게 살며 전 지구적으로 생각하다
이제 90세에 가까운 텐진 갸초는 여전히 자신을 단순히 '불교 승려'라고 부른다. 세계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많은 전통 의식을 버리고, 존경받기보다는 동등한 인간으로 소통하기를 선호한다.
그의 일상은 여전히 소박하다. 명상과 공부, 그리고 전 세계에서 온 방문객들과의 만남이 전부다. 그는 '행복의 기술'과 '기쁨의 책' 같은 베스트셀러를 저술하며 불교 지혜를 모든 종교에 접근 가능하게 만들었다.
달라이라마는 환경 문제, 정신 건강, 교육의 중요성 같은 현대적 도전들을 받아들였다. 그의 인스타그램은 수백만 명에게 다가가며, 고대 지혜가 디지털 공간에서도 번영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그의 가장 도발적인 입장은 자신의 환생에 관한 것이다. 그는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권위주의 국가의 통제 하에서는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는 그의 후계자 선택에 대한 중국의 주장에 직접적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그가 고대 전통을 현대 현실에 어떻게 적응시키고 있는지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