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현불 묘음 윤봉순 대보살의 신성화 (2019)
묘음 윤봉순 대보살의 신성화에 대한 간략한 설명
숙현불 묘음 윤봉순 대보살님의 신성화를 그리고 난 후 이렇게 수행에 정진하시고 성취를 이루신 분이 있으심에 마음이 감동되었다. 영적중심에 드러난 무한대 상징은 매우 밀도높게 그려졌으며 이 과정에만 1시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무한대 상징의 교차하는 중심에서 폭발적인 영적 교류가 이루어졌다. 발 아래의 물질 영역을 보면 영적인 빛의 상징이 크게 드러났는데, 이것은 세상에 커다란 영적인 빛을 전하는 의미이다. 72년간 24시간을 오직 묘법연화경(법화경)과 나무 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을 칭명 염송한 용맹정진의 강렬한 에너지가 신성화를 그리는 내내 교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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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화의 전반적인 구조를 알고싶다면 이 글을 읽어보세요. 인체의 각 부위에 따른 상징적 의미와, 자주 등장하는 영적 에너지의 상징들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2412_704c65-52> |
황금사리의 예언자: 놀라운 불교 대스승의 이야기
"5년 전 비로자나불로부터 신비한 예언을 받았다. 내 미간에는 황금사리가 나타날 것이며, 5시 20분에 도솔천으로 올라가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말씀을 기억하라."
한국의 존경받는 비구니 묘음보살은 여래종을 창시한 분이다. 그녀는 놀라운 예언을 했다. 2월 15일 오후 5시 20분 정확히 입적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정말 그대로 되었다. 스님들의 전통인 다비식에서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3만 개가 넘는 사리가 나타났는데, 언론에서는 약 1천 개 정도라고 보도했다. 그중에서도 특별한 황금사리 하나가 하얀 빛을 내며 빛났다.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고승들도 보통 200개 정도의 사리만 남겼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사리의 개수가 많든 적든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평생 고난 속에서도 수행에 매진했던 그녀의 순수한 마음과 헌신을 누구도 의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대형 종단 중심의 불교계에서 여성을 소홀히 여기는 분위기 때문에 그녀가 받을 만한 인정을 받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그녀가 남긴 유언은 이렇다. "내가 입적한 후에는 모든 중생에게 내 모습을 보여주겠다. 출가자들은 더욱 정진해야 하고, 나를 보는 재가신도들은 신심을 더욱 굳건히 하여 계를 잘 지켜야 한다. 이것이 출가자든 재가자든, 남자든 여자든 누구나 평등하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잘 지켜보라."
지금도 묘음보살의 사리를 직접 볼 수 있는 곳들이 있다. 남한산성 약사사에 약 1만 5천 개, 안양과 성남의 사찰에 각각 10개씩, 옥천 대약사에 1만 5천 개가 모셔져 있다. 이 사찰들은 사리를 보고 싶어 하는 방문객들을 언제든 환영한다. 기도와 염불을 통해 영적 감화를 받고 싶은 이들에게 그녀의 이야기는 빛나는 본보기가 되고 있다.
모든 것을 바꾼 두 번의 신비한 꿈
묘음보살은 놀라운 규율로 살았다. 매일 밤 자정이 되면 일어나 목욕재계한 후 다섯 시간 동안 정진했다. 하루 종일 눕든 앉든 걷든 항상 "법화경, 석가모니불"을 염송하며 참회하고 그 공덕을 모든 중생을 위해 회향했다.
입적 2년 전, 신비한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밤 보현보살이 하늘에서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인연이 이제 다했다. 속연을 끊고 우리에게 오라. 그러나 도솔천궁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삼번 계를 받아야 한다."
세번 계를 받은 후, 95세가 된 그해 12월 그녀는 신도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나는 2월 15일(부처님 열반일) 오후 5시 20분에 열반에 들 것이다. 5년 전 비로자나불로부터 예언을 받았으니 내 미간에 황금사리가 나타날 것이다. 기억하라. 5시 20분에 나는 도솔천으로 올라가 모든 중생을 구제할 것이다. 내가 입적한 후에는 모든 이에게 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모든 출가자는 더욱 정진하고, 나를 우러러보는 재가신도들은 신심을 굳건히 하여 계를 잘 지켜야 한다. 이것이 출가자나 재가자, 남녀 구분 없이 모두 평등하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증명이 될 것이다. 나는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근심과 고통의 윤회에 시달리는 중생들을 구제하겠다. 잘 지켜보라."
말 그대로 그녀는 예언한 그날 그 시간에 정확히 입적했다.
위험을 예고한 신비한 꿈
원래 묘음보살과 외아들인 인왕스님은 서울 인왕산에 약사암을 지어 살고 있었다. 그곳에 살던 중 1967년 10월 생생한 꿈을 꾸었다. 법당에 여행가방을 든 노승이 나타나 말했다. "1969년 1월 1일에 법난이 있을 것이다. 나는 먼저 만덕산으로 가니 그대와 아들도 만덕산으로 오라." 그리고는 동남쪽을 가리키며 성곽으로 둘러싸인 산을 향해 걸어갔다.
이상한 꿈에 의아해하며 인왕산 동남쪽에서 성곽이 있는 산을 찾다가 남한산성을 발견했다. 1968년 5월 그곳에 가서 주민들에게 만덕산이라는 곳을 물어보니, 남한산성과 검단산 사이에 있는 봉우리가 만덕산이라고 했다. 지역 전설에 따르면 성을 쌓을 때 그 산에서 금강역사가 나와 성 쌓는 일을 도왔으며,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동굴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 동굴은 지금도 남아 있다.
이런 인연으로 당시 감나무골이라 불리던 곳에 절터를 잡아 지금의 약사사를 세우게 되었다.
예언이 현실이 되다
과연 1969년 1월 1일 자정 후 인왕산 너머 세검정 일대에서 총성이 울렸다. 오전 7시가 되자 군인과 경찰이 산 곳곳의 암자를 뒤지기 시작했다. 원인은 김신조 일당이었다. 청와대를 습격하려던 북한 무장공비 30여 명 중 김신조만 투항하고 나머지는 모두 사살당했다. 이 사건 후 5월에 인왕산 일대의 암자들이 모두 철거되었다.
부처님이 이 모든 일을 미리 내다보시고 제자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정법을 펼칠 영구한 터전을 마련해 주신 것이다.
놀라운 용기로 살아낸 생애
묘음보살은 1906년 5월 9일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고령군 아름다운 미숭산 자락 용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윤경식과 어머니 강인곡보살 사이의 4남매 중 맏이였다. 전통 가정교육과 신식 교육을 받은 후 1926년 봄 20세에 신을용과 결혼했다. 21세인 1927년 12월 18일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훗날 한국대승불교여래종의 종정이 되는 인왕 신판석이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24세에 남편을 잃고 홀로 어린 아들의 교육과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집안 어른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경제적 해결책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일곱 살 아들 판석이를 데리고 관부연락선을 타고 조선해협을 건너 일본 나고야로 떠났다. 11년 동안 온갖 고생을 겪으며 여러 일을 하고 사업을 하며 미래의 기반을 다지고 아들의 교육과 성장을 위해 애썼다.
일본은 조선의 주권을 빼앗은 원수의 나라였지만, 동시에 조선보다 먼저 서구 문물을 받아들인 선진국이기도 했다. 11년간의 일본 생활은 모자에게 근대적 안목을 열어주었고, 아들이 훗날 뛰어난 종교 지도자가 되는 밑바탕이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태평양전쟁 종료 후, 아들이 19세가 된 1948년 가을 고국으로 돌아왔다.
영적 유산을 세우다
고향에서 격동의 해방 정국을 보낸 약 10년 후 서울로 올라왔다. 그곳에서 불교에 대한 신심이 깊어지며 삼보에 완전히 몸을 바쳤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남한산성 약사사를 비롯해 여섯 개의 사찰을 세우며 새로운 대승불교 종단인 한국대승불교여래종의 기틀을 마련했고, 1988년 정식으로 종단이 설립되었다.
남한산성 약사사에서 30여 년을 보내며 종단의 기초를 다진 그녀는 96세인 3월 9일 입적하며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양의 전신사리를 남겼다. 이는 그녀의 수행이 얼마나 철저하고 훌륭했는지를 강력하게 증명해 보였다. 생전에 깨달은 부처 묘음보살은 전설적인 신사임당을 뛰어넘는 어머니였고, 신도들과 이웃들에게는 실천으로 자비를 보여준 위대한 보살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보여준다. 헌신과 신심, 그리고 인내가 있다면 성별이나 출신에 관계없이 누구나 영적 위대함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그녀가 남긴 수천 개의 사리는 지금도 방문객들에게 감동을 주며, 모든 이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삶에 완전히 헌신한 증거로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