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산 스님의 신성화 (2019)
숭산 스님의 신성화에 대한 간략한 설명
숭산 스님의 신성화는 그의 영적인 핵심 속에 존재하는 빛의 상징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 드러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빛의 상징 너머로, 황금빛 에너지 흐름이 영적인 영역을 흐르는데, 이는 숭산 스님만의 독특한 영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원형의 에너지 장은 건강하고 강인해 보인다. 그러나 발 아래 위치한 물질적인 영역에서는 에너지 흐름이 방해받거나 교란되는 부분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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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화의 전반적인 구조를 알고싶다면 이 글을 읽어보세요. 인체의 각 부위에 따른 상징적 의미와, 자주 등장하는 영적 에너지의 상징들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2412_704c65-52> |
Quote
“The Truth is realized in an instant; the Act is practiced step by step.”
_Seung Sahn
“Clear mind is like the full moon in the sky. Sometimes clouds come and cover it, but the moon is always behind them. Clouds go away, then the moon shines brightly. So don’t worry about clear mind: it is always there. When thinking comes, behind it is clear mind. When thinking goes, there is only clear mind.”
_Seung Sahn
“If you throw away all thoughts of attainment, you will then come to see the real purpose of your quest.”
_Seung Sahn
“When reading, only read. When eating, only eat. When thinking, only think.”
_Seung Sahn
“Don’t know – straight line – clear mind.”
_Seung Sahn
“If you want something, then you lose everything. If you don’t want anything, then you already have everything.”
_Seung Sahn
세탁기 수리공에서 미국 최초의 한국계 선불교 스승이 된 이야기
1972년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에 한 젊은 한국 승려가 발을 디뎠다. 영어라곤 몇 마디 안 되는 그가 세탁소에서 세탁기를 고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런데 몇 년 지나지 않아 전 세계에 100여 개의 선불교 도량을 세우고 서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불교 스승 중 한 명이 되었다. 바로 숭산(崇山) 스님이다. '높은 산'이라는 법명 그대로 살아간 이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혁명가에서 승려로
1927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덕인(德仁)이라는 이름의 아이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하지만 열일곱 살에 지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일본군에 붙잡혀 감옥에 갇히고 총살형까지 당할 뻔했다.
해방 후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그는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동국대학교에서 서양철학을 공부하던 중 친구가 건넨 『금강경』 한 권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1948년, 그는 학업을 포기하고 불문에 들어섰다.
산속에서의 100일
이후 벌어진 일은 전설 같은 이야기다. 젊은 승려는 혼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100일 동안 솔잎과 빗물만으로 연명하며 진언을 외웠다. 이 치열한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산에서 내려온 그는 당시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선사였던 고봉(古峯) 스님을 찾아갔다. 고봉 스님은 까다롭기로 소문났고 보통은 일반인만 가르쳤지 승려는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젊은이에게서 뭔가 특별한 것을 느꼈나 보다. 1949년 1월 25일, 고봉 스님은 그의 깨달음을 인정하고 법을 전했다. 스물두 살에 한국 최연소 선사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서쪽으로 향하다
한국전쟁 때 군종장교로 복무하고 서울의 한 사찰 주지로 지낸 뒤, 숭산 스님은 한국을 넘어선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대에 일본과 홍콩에 사찰을 세운 그는 1972년 가장 과감한 도전에 나섰다. 바로 미국행이었다.
서툰 영어 실력으로 프로비던스에 도착한 그가 찾은 일자리는 세탁기 수리공이었다. 손으로는 기계를 고치면서도 마음은 늘 가르침에 머물러 있었다. 틈틈이 영어를 익혔고 곧 브라운 대학교 학생들이 그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공동체를 만들어가다
좁은 아파트에서 시작된 소박한 대화는 빠르게 발전했다. 1974년에는 프로비던스 선원을 설립했다. 이후 전 세계 100여 개 도량의 첫 시작이었다. 전통적인 한국 사찰처럼 승려와 일반인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함께 수행하는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의 가르침 방식은 서구 제자들에게 딱 맞았다. 복잡한 철학 대신 선불교의 핵심을 꿰뚫는 간단하고 직접적인 말을 썼다. 그의 대표적인 가르침은 "오직 모를 뿐"이었다. 고정된 생각 대신 열린 마음으로 의문을 품고 살라는 뜻이다. 제자들에게는 "오직 곧게 가라"고 했다. 매 순간 온전한 마음으로 행동하라는 의미였다.
"오직 모를 뿐"의 예술
숭산 스님은 과거의 지혜를 현대 미국인의 언어로 번역하는 데 탁월했다. 제자들이 복잡한 불교 질문을 던지면 이렇게 답하곤 했다. "하늘은 파랗고 풀은 푸르다. 더 무엇을 원하나?" 이는 무성의한 답변이 아니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의 각성을 직접 가리키는 말이었다.
한국 승려들이 천 년 넘게 해온 90일간의 집중 수행인 '결제(結制)'를 서구 학생들에게 소개했다. 하지만 일반 서구인들의 삶에 맞게 변형해서 대학생이나 직장인 부모들도 지혜에 다가갈 수 있게 했다.
1983년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도량들이 '관음선종(觀音禪宗)'으로 통합되었다. '관음'은 '세상의 소리를 듣는다'는 뜻으로, 세상의 고통을 듣고 자비로 응답한다는 그의 불교관을 담고 있다. 개인 수행과 적극적인 세상 참여를 모두 아우르는 시각이었다.
현재 이 종단은 12개 언어로 남북미, 유럽, 아시아에서 활동하며 40여 명의 공인 스승이 그의 법맥을 이어가고 있다. 2004년 입적 전에는 한국에 무상사(無相寺)를 세워 전 세계 수행자들을 위한 국제 수행 도량으로 만들었다.
숭산 스님은 2004년 11월 30일 서울 화계사에서 제자들에 둘러싸인 채 평온하게 입적했다. 향년 77세, 50여 년간 가르침을 펼친 삶이었다. 아시아 불교를 서구에 전한 그의 영향은 실로 변혁적이었다. 문화를 이어주면서도 진정한 지혜의 본질은 지켜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