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의 신성화 (2019)
스티브 잡스의 신성화에 대한 간략한 설명
나는 그가 선불교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있다. 불필요한 것이 제거된 단순한 아름다움은 그가 가진 영적 방향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영적 중심에서 빛이 현현하고 있고 자기 자신과 영적 영역을 역동적인 변화로 연결시키고 있다. 또한 강한 에너지 장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몸의 복부에서 허벅지까지 상처같은 흔적이 보이고 그가 나아가고자 했던 방향성에 방해가 되는 물질적인 에너지체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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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화의 전반적인 구조를 알고싶다면 이 글을 읽어보세요. 인체의 각 부위에 따른 상징적 의미와, 자주 등장하는 영적 에너지의 상징들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2412_704c65-52> |
Quote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남의 인생을 따라 살며 허비하지 마세요."
— 스탠포드 졸업식 연설, 2005
"진정 의미 있는 일을 하려면 자신이 하는 일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직 그런 일을 찾지 못했다면 멈추지 말고 계속 찾으세요. 타협은 금물입니다."
— 스탠포드 졸업식 연설, 2005
"혁신이야말로 리더와 팔로워를 가르는 결정적 차이점입니다."
— 인터뷰, 2001
"늘 갈망하고, 늘 겸손하세요."
— 스탠포드 졸업식 연설, 2005
"타인의 잡음에 휩쓸려 자신 안의 목소리를 놓치지 마세요."
— 스탠포드 졸업식 연설, 2005
"성공하는 기업가와 그렇지 못한 기업가를 나누는 요소 중 절반은 바로 끈질긴 인내심이라고 확신합니다."
— 인터뷰, 1995
"품질의 기준점이 되어주세요. 탁월함을 추구하는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거든요."
— 인터뷰, 1987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다. 그게 아니라면,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지?"
— 애플 오프사이트, 1997년
뭔가를 만들기 좋아했던 소년
1955년 2월 24일,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스티븐 폴 잡스가 태어났다. 친부모가 그를 키울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폴과 클라라 잡스 부부가 따뜻한 사랑으로 그를 맞아들였다. 양부모는 입양한 아들을 반드시 대학에 보내겠다고 약속했지만, 스티브에게는 배움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서 자란 스티브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 그는 몇 시간씩 전자제품을 조립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 폴은 차고에 특별한 작업대를 만들어주며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즐거움을 아들과 나눴다. 스티브는 아버지가 아름다운 물건들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감탄하며 지켜봤고, 훗날 아버지가 "무엇이든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학교생활은 항상 순탄하지 않았다. 스티브는 장난치기를 좋아했고 종종 말썽을 부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결코 그를 혼내지 않았다. 대신 학교가 똑똑한 아들에게 충분한 자극을 주지 못한다고 믿었다. 열 살이 되었을 때, 스티브는 이미 동네 엔지니어들과 친구가 되어 그들의 지식을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스티브는 스스로를 "전선광(wireheads)"이라고 부르는 전자공학 클럽에 가입했다. 바로 그곳에서 그의 인생을 영원히 바꿀 사람을 만났다. 스티븐 워즈니악이라는 전자공학 천재였는데, 그 역시 놀라운 것들을 만들어내는 데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1972년 리드 대학에 잠깐 다닌 후, 스티브는 남다른 길을 택했다. 최초의 비디오 게임 회사 중 하나인 아타리에서 일했지만, 불안한 영혼은 그를 세계로 이끌었다. 1974년, 그는 7개월 동안 인도를 여행하며 선불교를 통해 지혜를 구했다. 이 영적 여행은 앞으로 수년간 그의 디자인 철학과 삶의 태도에 영향을 미쳤다.
스티브가 캘리포니아로 돌아왔을 때, 워즈니악은 여가 시간에 특별한 것을 만들고 있었다. 워즈니악은 컴퓨터를 만들었는데, 그때까지 존재했던 방 크기의 괴물 같은 것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강력한 무언가였다. 스티브는 친구가 놓친 가능성을 즉시 알아챘다.
혁신을 시작한 차고
1976년, 스무 살 초반의 젊은 청년 두 명이 좁은 차고에서 함께 일을 시작했다.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이 애플컴퓨터를 창립한 것이다. 당시 잡스는 고작 21세에 불과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놀라운 사업가적 직감을 보여주었고, 이는 훗날 큰 가치를 증명하게 된다.
"애플"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영감의 순간에서 나왔다. 어느 날 아침 사과 과수원에서 시간을 보낸 후, 스티브는 그들의 컴퓨터를 "애플"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었고, 친근하고 다가가기 쉬운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꿈에 자금을 대기 위해 스티브는 자신의 차를, 워즈니악은 애지중지하던 계산기를 팔았다.
그들의 첫 작품인 애플 I은 본질적으로 컴퓨터 애호가들이 작동하는 기계로 조립할 수 있는 회로판이었다. 첫해에 거의 200대가 팔렸지만, 스티브는 더 큰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77년 출시된 애플 II가 그들의 돌파구였다. 이 화려하고 사용자 친화적인 컴퓨터는 처음으로 기술을 미국 가정에 들여놓았고, 애플을 미국 최고의 기업 중 하나로 만들었다.
꿈이 벽에 부딪혔을 때
성공은 새로운 도전을 가져왔다. 1984년 애플은 마우스와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특징으로 하는 혁신적인 컴퓨터 매킨토시를 선보였다. 스티브는 이것이 모든 것을 바꿀 것이라고 믿었지만, 맥은 마이크로소프트 소프트웨어를 실행하는 더 저렴한 경쟁업체들과의 경쟁에서 고전했다. 압박이 가중되었고, 애플 이사회와의 의견 차이는 고통스러운 결정으로 이어졌다. 1985년 스티브는 자신이 공동 창립한 회사에서 해고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포기했겠지만, 스티브는 대부분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실망감을 새로운 사업으로 승화시켜 대학과 기업을 위한 고급 기계를 만드는 넥스트 컴퓨터를 설립했다. 더 중요한 것은 작은 그래픽 회사를 1천만 달러에 사들여 픽사로 변화시킨 것이었다.
픽사는 스티브의 예상치 못한 금광이 되었다. 이 회사의 첫 영화 "토이 스토리"는 애니메이션에 혁명을 일으켰고 컴퓨터가 영화의 마법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증명했다. 픽사는 계속해서 "니모를 찾아서", "몬스터 주식회사", "카" 같은 사랑받는 영화들을 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티브는 애플에서의 첫 번째 시절보다 픽사에서 더 많은 돈을 벌었다.
1997년까지 애플은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운명의 장난처럼, 회사는 넥스트를 인수하면서 20년 전 공동 창립했던 회사로 스티브를 다시 불러들였다. 이제 CEO로서 그는 애플을 파산에서 구해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스티브의 복귀는 애플 최고의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디자이너 조니 아이브와 긴밀히 협력하며, 그는 산업 전체를 재편할 일련의 제품들을 선보였다. 화려한 아이맥 컴퓨터와 세련된 노트북들이 혁신에 대한 애플의 명성을 되살렸다.
그리고 게임 체인저들이 등장했다. 2001년 스티브는 "주머니에 1천 곡을 담는" 기기인 아이팟을 공개했다. 아이튠즈 소프트웨어와 결합된 아이팟은 사람들이 음악을 사고 듣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하지만 스티브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07년 그는 휴대폰, 아이팟, 컴퓨터를 하나의 마법 같은 직사각형으로 결합한 아이폰을 선보였다. 3년 후 아이패드는 완전히 새로운 태블릿 컴퓨터 카테고리를 창조했다.
스티브 잡스는 기술이 강력하면서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우아한 디자인과 사용자 친화적 인터페이스에 대한 그의 고집은 모든 기술 회사의 기준을 높였다. 그는 단순히 제품을 만든 것이 아니라 사용하기에 거의 마법 같은 경험을 창조했다.
안타깝게도 스티브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2003년 암 진단을 받았지만 2011년까지 애플을 이끌어나갔다. 2011년 10월 5일,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수천억 달러 가치의 회사와 전 세계 발명가들에게 계속 영감을 주는 유산을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