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스님의 신성화 (2019)
성철 스님의 신성화에 대한 간략한 설명
그를 둘러싸고 있는 강력한 에너지장을 보라. 영적중심은 강하게 일렁이고 몸의 모든 챠크라들이 명료하게 현현하고 있다. 성철 스님의 신성화를 그리는 과정에서 큰 에너지가 나에게 전이되어 오는 것을 느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 |
신성화의 전반적인 구조를 알고싶다면 이 글을 읽어보세요. 인체의 각 부위에 따른 상징적 의미와, 자주 등장하는 영적 에너지의 상징들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2412_704c65-52> |
Quote
"눈을 뜨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_성철 스님
"잠은 네 시간을 넘기지 말라. 말은 꼭 필요한 것만 하라. 책은 읽지 말라. 군것질하지 말라. 이곳저곳 떠돌아다니지 말라."
_성철 스님
"이 길에서는 아무도 당신을 도울 수 없다. 어떤 책도, 어떤 스승도, 심지어 부처님도 마찬가지다. 오직 자신만이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_성철 스님
"우리가 참된 자아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세 가지 독은 탐욕과 분노, 그리고 무명이다. 이 중에서도 탐욕이 나머지 둘의 뿌리가 되며, 탐욕은 바로 '나'에서 비롯된다. '나'에 대한 집착, 자아에 대한 애착, 남에 대한 무관심—이 모든 것이 괴로움의 근원이다."
_성철 스님
"나와 너, 자아와 무아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으면,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진리를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남을 돕는 것이 곧 자신을 돕는 것이고, 남을 해치는 것이 곧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주의 이치이며, 중도이고, 연기법이며, 인과응보다."
_성철 스님
"많은 수행자들이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믿는다. 어떤 이는 여러 번 깨달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큰 착각이다. 참된 깨달음은 단 하나뿐이며, 한번 얻으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은 잠 속에서도 변함없이 지속된다. 마조가 말했듯이 '한번 얻으면 영원히 얻는 것'이다. 왔다 갔다 하거나 정도의 차이가 있는 깨달음은 모두 착각에 불과하다."
_성철 스님
"깊은 잠 속에서도 선정에 들 수 있는 경지를 넘어서면, 완전한 고요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 그곳에서 당신은 온갖 먼지가 쌓였던 본래의 밝고 빛나는 거울을 발견할 것이다. 자신의 본래 면목과 참된 본성, 온 우주의 본성을 보게 되고, 자신이 처음부터 줄곧 부처였음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열반이다."
_성철 스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면, 산은 그저 산이고 물은 그저 물이다."
_성철 스님
한국 불교를 영원히 바꾼 산중의 스님
성철(聖哲, "성스러운 지혜")은 명상 수행에 헌신한 것으로 유명한 한국의 선사였다. 그는 10년 동안 자신의 산사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사찰을 철조망으로 둘러싸고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지냈다. 불교 수행에 대한 그의 헌신은 승려들의 기준으로 보아도 놀라웠으며, 그의 이야기는 현대 한국 선불교의 흥미로운 단면을 보여준다.
1912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성철 스님은 자라서 그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불교 지도자가 되었고, 수백만 한국인들로부터 '살아있는 부처'라는 드문 칭호를 받았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사람의 영적 여정에 관한 것이 아니다.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가진 한 사람이 어떻게 종교의 전통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학자의 아들에서 구도의 승려로
성철 스님은 이영주라는 이름으로 경상도의 존경받는 유학자 집안에서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학문을 중시하고 전통 한국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가정에서 자란 어린 영주는 학자의 길을 걸을 운명인 것 같았다. 하지만 운명은 다른 계획을 갖고 있었다.
25세가 되었을 때, 그의 마음속에 책이나 세속적 성공으로는 채울 수 없는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그 세대의 많은 젊은 한국인들처럼, 그는 불교가 약속하는 내적 평화와 깨달음에 이끌렸다. 이것은 단순한 관심이 아니었다. 그는 가족의 편안한 생활을 떠나 행각승이 되어 성철이라는 법명을 받을 정도로 강렬한 부름이었다.
번개처럼 빠른 깨달음
다음에 일어난 일은 영적 발전에 대한 우리의 모든 기대를 뒤엎는다. 대부분의 불교 승려들이 깨달음의 편린을 얻기 위해 수십 년을 명상에 매진하는 반면, 성철 스님은 불교도들이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부르는 경지를 단 3년 만에 성취했다.
1940년 금당선원에서 명상 수행 중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돌파의 순간에 그가 쓴 시는 한국 전역에서 유명해졌다:
"황하수 거꾸로 흘러 곤륜산 꼭대기로 가니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대지가 무너져 내리네 한 번 웃고 돌아서니 푸른 산이 백운 속에 예전처럼 서 있구나"
이것은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었다. 그의 완전한 영적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축하하는 대신 성철 스님은 예상치 못한 일을 했다. 한국 불교의 현실에 대해 깊은 우려를 갖게 된 것이다.
철조망 뒤의 은둔자
1955년까지 성철 스님은 한국 사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실망감을 느꼈다. 너무 많은 승려들이 진정으로 준비되지 않았는데도 깨달은 것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사찰 정치는 복잡해졌고, 불교 수행의 순수한 정수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의 해결책은 과격했다. 완전한 고립이었다. 대구 근처 성전암에서 그는 작은 수행처를 철조망으로 둘러싸고 믿을 수 없는 10년 동안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방문객도 없고, 방해도 없고, 타협도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세상으로부터 숨는 것이 아니었다. 이 은둔 기간 동안 성철 스님은 후에 그의 가르침을 혁신적으로 만들 집중적인 자기 교육에 매진했다. 그는 고대 불교 경전을 연구하고, 현대 과학, 수학, 물리학, 화학을 공부했으며, 세계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영어까지 독학했다. 깊은 영적 수행과 폭넓은 지적 호기심의 독특한 결합은 후에 그의 가르침을 한국이 지금까지 본 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들었다.
가르침의 혁신
성철 스님이 마침내 1965년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한국 불교는 수 세기 만의 가장 큰 변화를 경험하려 하고 있었다. 한국의 가장 중요한 사찰 중 하나인 해인사의 주지로 임명된 그는 '백일법문'이라고 알려진 것을 시작했다.
이것들은 평범한 종교 강의가 아니었다. 불교 지혜, 양자물리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현재 세계 정세를 자연스럽게 엮어낸 법문을 상상해보라. 성철 스님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했다. 고대의 힘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대적이고 교육받은 마음에 말하는 영적 가르침이었다.
그의 접근법은 뛰어나면서도 엄격했다. 기업 총수든 정부 관리든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먼저 부처님 앞에서 3천 배(온몸으로 하는 절)를 완료해야 했다. 이것은 벌이 아니었다. 방문자들이 진정한 겸손과 헌신으로 다가오도록 하는 그의 방법이었다.
국가의 영적 삶을 이끌다
1981년 성철 스님은 한국 불교의 최고 지위인 조계종 종정을 수락했다. 그의 취임 법어는 한국 전역의 거리에서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 간단해 보이는 말은 선불교에서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깨달음이 세상의 모습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보는 방식을 완전히 변화시킨다는 궁극적 이해를 나타낸다. 급속한 근대화와 사회 변화로 고민하는 평범한 한국인들에게 이 말은 위안과 지혜를 동시에 주었다.
국가 최고의 불교 지도자가 되었음에도 성철 스님은 결코 산중 수행처를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로부터 지도를 받고 싶다면 직접 그를 찾아와야 했고, 3천 배도 포함해서 말이다. 이것은 한국 사회에서 불교 승려들에 대한 전례 없는 존경심을 만들어냈다.
오늘날까지 울려 퍼지는 가르침
성철 스님의 불교에 대한 가장 중요한 기여는 '돈오돈수'(頓悟頓修)에 대한 그의 고집이었다. 그는 깨달음이 여러 생에 걸친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발전을 필요로 한다는 일반적인 믿음에 반대했다. 대신 고대 중국 선사들의 원래 가르침을 따라, 완전한 깨우침은 한순간에 일어나며 즉시 사람을 완전히 변화시킨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단순한 이론적 논쟁이 아니었다. 수천 명의 한국 승려들이 수행에 접근하는 방식을 바꾸었다. 그의 영향 하에 해인사는 매 선방마다 약 500명의 승려들을 끌어모았는데, 이는 중국 불교의 황금기 이후 볼 수 없었던 숫자였다.
그의 가르침은 또한 고대 지혜와 현대 과학 사이의 다리를 놓았고, '중도'와 같은 불교 개념이 실제로 에너지와 물질의 본성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발견과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전통적 가치와 현대 교육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하는 한국인 세대에게 이런 종합은 혁명적이었다.
성철 스님이 1993년 81세의 나이로 입적했을 때, 한국은 단순한 종교 지도자 이상을 잃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수 세기 동안의 쇠퇴기를 거친 한국 불교에 단독으로 존엄성과 지적 엄격함을 되돌려준 인물을 잃은 것이다.
그의 영향은 한국의 국경을 훨씬 넘어선다. 그가 옹호한 집중적인 선 명상 수행의 부활은 아시아 전역으로, 심지어 불교가 실천되는 서구 국가들로까지 퍼져나갔다. 과학적 사고와 영적 지혜의 통합은 현대성과 씨름하는 전 세계 종교 지도자들에게 모델을 제시한다.




